FANDOM


박영희
출생일 1901년 12월 20일
서울
사망일 사망일 불명
직업 평론가,작가,언론인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르 문학평론,시,소설

박영희(朴英熙, 일본식 이름: 芳村香道, 1901년 12월 20일 ~ ?)는 한국의 문학평론가이다. 시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호는 회월(懷月), 송은(松隱)이다.

생애 Edit

출생과 성장 Edit

한성부에서 출생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카프에서 함께 활동한 김기진과는 배재고보 동창이며, 나도향, 안석주, 김복진 등과도 배재고보에서 만나 친교를 맺었다.

1920년 배재고보를 수료한 뒤 일본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문단 등단과 낭만주의 문학 Edit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1년 귀국한 뒤 시 동인지 《장미촌》을 발행하며 창간호에 〈적(笛)의 비곡(悲曲)〉, 〈과거의 왕국〉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같은 해 《신청년》에 동인으로 참가했고, 1922년에는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감상적인 내용을 담은 낭만주의적 시를 썼다.

'병적 낭만주의'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현실 도피적이고 유약한 감상에 도취된 〈월광으로 짠 병실〉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카프 결성과 경향파 문학 Edit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개벽》에 입사한 후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서구식 낭만주의풍의 작품 경향에도 변화가 왔다. 도쿄에 유학한 친구 김기진이 일본에서 유행한 프로문학에 먼저 입문하면서 박영희의 감상적 낭만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백조》를 와해시키고 프로문학을 국내에 소개했다.

파스큘라는 1925년 염군사와의 통합을 통해 카프로 발전하였으며, 박영희는 카프 창립부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았다. 이 시기부터는 시 창작보다는 소설과 평론 작업으로 관심도 옮겨갔다.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사냥개〉는 박영희의 의식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도덕하고 인색한 지주인 구두쇠 노인이 기르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다는 줄거리의 〈사냥개〉는 우화적 수법으로 쓴 신경향파 소설로, 이기영의 〈쥐 이야기〉, 김기진의 〈붉은 쥐〉와 유사하게 동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1926년 프로문학 반대 진영의 대표적 작가인 염상섭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그해 말부터는 김기진과 계급문학과 카프의 노선을 놓고 내용과 형식 중 어떤 것을 우선시할 것이냐는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김기진이 다소 유화적인 입장으로 포괄적 계급문학을 주창한데 반하여 박영희는 강경 노선을 택하여 이데올로기 우선을 내세웠다. 역시 강경파인 임화가 박영희 편에 가세하고 김기진을 공박했고, 이어진 아나키즘 논쟁을 거쳐 김화산 등 아나키스트 분파를 제명하면서 카프의 제1차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전향과 순수 문학 Edit

1929년 경부터 자신이 지원해 도쿄 유학을 다녀온 임화가 김남천 등 소장파를 규합하여 제2차 방향 전환을 시도하면서 박영희는 카프에서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었다.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약 석달 후 석방된 후 카프의 좌경향에 회의를 품던 중 1933년 카프를 탈퇴했다. 1934년 초에는 《동아일보》에 공개적으로 전향 선언을 발표하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이후 극단 신건설 창립을 계기로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이 발생하면서 체포되어 약 1년 가량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출옥한 뒤에도 사상범으로 보호관찰소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시기의 평론은 초기와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심미적인 경향을 보인다. 초기 시를 묶어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1937)도 발간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의 친일 문학 Edit

1938년 전향자 대표로 선출되어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라는 행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귀국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고,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김동인, 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에 포함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된 뒤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총 1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1] 《매일신보》에 실은 〈국민문학의 건설〉(1940) 등 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문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설들이다.

광복과 한국 전쟁 Edit

광복 후 친일 경력 때문에 잠시 강원도 춘천으로 낙향했다가, 좌익 경력을 가진 전향자 단체인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정백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개전 초기에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피해 피신하다가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납북된 것으로 추정[2]되나 북조선에서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자료 Edit

  • 권영민 (2004년 2월 25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348~350쪽. ISBN 8952104617.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년 7월 1일). 〈박영희 :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임규찬)〉,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8971990139.

주석 Edit

  1. 김재용 (2002년 8월).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67호): 123~148쪽.
  2.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 박영희 (朴英熙)

Ad blocker interference detected!


Wikia is a free-to-use site that makes money from advertising. We have a modified experience for viewers using ad blockers

Wikia is not accessible if you’ve made further modifications. Remove the custom ad blocker rule(s) and the page will load as expected.

Also on FANDOM

Random Wiki